이태원의 역사와 유래
이태원의 유래
이태원이라는 지명은 조선시대 효종(1619~1659) 때 배밭이 많은 동네라 해서 배나무 이(梨)가 붙은 이태원(梨泰院)으로 불렸다고 전해진다. 임진왜란 때 조선에 항복한 왜군들이 이곳에 귀화해 살았다는 뜻으로 '이타인(異他人)'이 어원이라는 견해도 있고, 임진왜란 이후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한 일본인, 왜란 중 원치 않은 임신으로 낳은 아이들이 모여 사는 동네라 하여 다를 이(異), 아이 밸 태(胎)를 써서 이태원(異胎圓)이란 이름이 불여졌다는 주장도 있다.
한국민속문학사전에 '이태원'이라는 마을 명칭의 유래를 설명하는 전설이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일본군이 서울로 쳐들어왔을 때, 당시 지금의 이태원 황학골이란 곳에 비구니들이 거주하는 운종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한다. 왜장 가토 기요마사는 부하들을 이끌고 이 절에 들어가서 비구니들을 탈취해 얼마 동안 머물며 지내다가, 이곳을 떠나며 그 절을 불태워 버렸다. 그때 왜장들과 관계를 가졌던 비구니들은 갈 데가 없어 융경산 부군당 밑에 토막을 짓고 살다가, 아이를 낳게 되었는데, 이웃 마을 사람들이 이를 알고 그곳을 이태(異胎)가 있는 집이라 하였고, 그 일대를 이태원(異胎圓)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태원의 역사
이태원은 한양으로 통하는 주요 관문으로, 교통의 요지이자 군사적 요충지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특히 용산은 일제강점기에 일본군의 주둔지가 되었고, 광복 이후 미군의 주둔지로 이용되면서, 이태원은 외국인이 다수 거주하는 지역이 되었다. 1957년 미군이 외박과 외출을 허용받게 되면서 이 일대에 기지촌이 생겼다. 기지촌은 병영을 중심으로, 그 주변에 서비스업 중심의 생활권을 형성하는 군사취락을 말하는데, 1970년대 이태원은 미군기지에서 나온 물품들로 상권이 형성되면서 기지촌과 미국식 클럽이 성행했다. 이러한 탓에 오늘날 '기지촌'이란 말은 한국에 주둔한 미군 부대 근처에 생긴 마을이란 의미로 쓰이고 있다. 이태원 일대에 주둔하던 미군이 평택으로 이전하고, 서울시의 퇴폐업소 단속 강화와 90년대 초 '범죄와의 전쟁'으로 이태원 상권이 위축되었다. 강남이나 신촌, 홍대입구 등 새로운 유흥지역이 등장하면서 이태원은 불황을 겪기도 하였다. 한편, 한국전쟁 당시 이태원은 북에서 남으로 넘어온 월남민들이 집단 거주하면서 '해방촌'이 형성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이태원에서 세계를 만난다.
이태원은 서울의 관광특구 1호이자 서초구 서래마을과 더불어 대표적인 다문화 거리로 꼽힌다. 아픈 역사와 그 흔적을 간직한 이태원은 대한민국과 세계가 만나는 '초국적' 공간을 대표할 수 있는 지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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